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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고기 금지법 통과 촉구…할리우드·참전용사 한 목소리

한국전 참전 용사, 할리우드 연예인, 정치인 등이 한국 정부에 개 식용 금지 법안 통과를 촉구하고 나섰다.   한국 국회는 지난 17일(한국시간) 개 식용 금지 법안의 연내 제정 목표를 밝힌 바 있다.     〈본지 11월 18일 자 A-3면〉   글로벌개식용금지연합(GADMC)은 지난 20일 영상을 공개하고 한국 정치권을 향해 “개고기 금지법을 통과시킬 것을 요구하는 지지자들의 성명서 일부를 간략하게 편집했다”며 “올바른 결정을 내려주길 부탁한다”고 밝혔다.   이 영상에는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의 전 부인이자 배우인 프리실라 프레슬리를 비롯한 캐서린 헤이글(에미상 수상자), 브래드 셔먼(연방하원의원), 한국전 참전 용사인 앤서니 멜로카, 오빌 맥키니 등이 개고기 금지를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배우인 캐서린 헤이글은 “한국은 혁신의 나라인데 여전히 개고기 시장이 존재하고 있다”며 “이번 기회에 한국에서 개고기 시장이 완전히 없어지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프리실라 프레슬리는 “한국 국회에서 발의된 이번 법안을 적극 지지한다”며 “개식용 금지를 위해 노력해준 한국의 영부인 김건희 여사와 법안을 발의한 한정애 의원에게도 감사하다”고 전했다.   한편, 이번에 개식용 종식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되면 개 사육, 도살, 유통, 판매 등이 전면 금지된다. 본지 역시 지난해 동물 보호단체인 휴메인소사이어티인터네셔널(HSI)과 함께 한국의 개고기 금지를 위해 ‘개 식용 종식, 1인치 남았다’라는 주제로 기획 시리즈〈본지 2022년 6월 29일자 A-1면〉를 10회에 걸쳐 보도한 바 있다. 장열 기자ㆍjang.yeol@koreadaily.com개고기 금지법 개고기 금지법 한국전 참전 목소리 한국전

2023-11-23

한국전 참전 미군 후손 장학기금 2만불 쾌척

한인 여성이 한국전 참전 미군 후손 장학 기금으로 거액을 쾌척해 화제다.   주인공은 롤링힐스에 거주하는 홍성혜(79)씨다. 홍씨는 지난 11일 한국전참전용사기념비위원회(이하 위원회, 회장 노명수)가 풀러턴 힐크레스트 공원 내 참전용사 기념비(이하 기념비) 앞에서 개최한 제1회 한국전 참전 미군 후손 장학금 수여식이 끝난 직후, 위원회 측에 장학 기금으로 써 달라며 2만 달러를 기부했다.   홍씨는 지난 2021년 4월에도 위원회에 기념비 건립 기금 3만 달러를 기부한 바 있다. 〈본지 2021년 4월 27일자 A-15면〉 위원회는 같은 해 11월 11일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홍씨는 본지와 통화에서 “미군 후손 10명에게 각 2500달러를 주는 첫 장학금 수여식을 개최한다는 위원회 측 초청을 받고 선약을 취소하고 참석했다. 너무 좋은 일이란 생각에 기부를 결심했다. 첫 수여식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라고 밝혔다.   홍씨는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이라고 하지만, 우리에게 6·25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국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미군 용사들의 후손이 장학금을 받는 사례가 늘수록 한국전을 기억하는 미국인도 많아질 것이다. 마음 같아선 매년 2만 달러씩 기부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홍씨는 만 6살 때 6·25를 겪었다. 용산 경찰서 서장으로 재직하던 아버지, 동생을 임신한 어머니, 일가친척들과 피란길에 올라 대구에 도착한 홍씨는 아기를 낳던 어머니와 동생을 모두 잃는 아픔을 겪었다.   1970년 가족과 함께 이민 온 홍씨는 리커스토어, 모빌홈 파크, RV 파크 등을 운영하다 은퇴했다.     홍씨는 기념비 건립에 관한 본지 기사를 읽고 감동해 위원회 측과 인연을 맺게 됐다고 설명했다.   노 회장은 “홍 여사의 기부에 깊이 감사드린다. 앞으로 기념비를 잘 관리하고 미군 후손 대상 장학 사업을 발전시키며 한미동맹 강화에 힘을 보태겠다”라고 말했다.   위원회는 장학금 수여식에서 홍씨를 포함한 12명에게 대한민국평화통일국민문화재 조직위원회(총재 황우여)가 수여한 한반도 평화 메달을 전달했다. 〈본지 11월 14일자 A-15면〉  임상환 기자장학기금 한국전 후손 장학기금 한국전 참전 미군 후손

2023-11-19

한국전 전사자 고향찾아 4만마일…버몬트 구성열·김창화씨 부부

한국전 참전 용사의 이름을 가슴에 품고 전국의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감사를 전하는 한인 노부부가 있다.   이들이 향하는 곳은 전사자들의 고향이다. 버몬트주에 사는 구성열(80), 김창화(77)씨 부부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고향을 찾아가 전사자들의 이름으로 지역 초등학교 도서관에 책과 기부금을 전달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전사자를 기리고 한국전의 뜻깊은 역사를 학생들에게 알리기 위해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벌써 3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0년 10월 버몬트주 리즈보로센트럴학교(Readsboro Central School)를 시작으로 지난 19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식스 마일 초등학교(Six mile Elementary School)까지 총 33개 주 33개 학교에 기부금을 전달했다.   구씨 부부는 현재 식스 마일 초등학교 방문을 마치고 플로리다, 아칸소, 켄터키주 지역으로 이어지는 전사자의 고향 방문 일정을 28일까지 진행하고 있다.   구성열 씨는 19일 본지와 인터뷰에서 “전사자 명단을 일일이 살피며 마음에 와 닿거나 특별한 이야기가 있으면 주마다 한 명씩 선정해 그들의 고향 지역 초등학교를 방문하고 있다”며 “켄터키주까지 가면 36개 학교에 기부금을 전달하게 되는데 내년까지 50개 주를 모두 마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일례로 식스 마일 초등학교의 식스마일 지역은 ‘찰스 헤이워드 바커(당시 18세)’ 일등병의 고향이다. 바커 일등병은 미군 제7보병사단 소속으로 경기도 연천군 천덕산 주변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고지전이 벌어졌던 ‘폭찹힐(Pork Chop Hill)’ 전투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전사한 청년이다.   구씨는 “바커 일등병의 이야기를 살펴보니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부모 몰래 서명을 해서 15살 때 입대를 했다고 하더라”며 “그런 아이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는데 어떻게든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들은 세 가지 선물을 들고 초등학교를 방문한다. 전사자를 기리기 위해 이름이 새겨진 명패, 한국전 역사가 담긴 책 그리고 기부금(5033달러)이다. 초등학생들을 만나 한국전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전사자의 이야기를 나누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일은 이들에게 가장 보람찬 일이다. 이번에 켄터키주 일정까지 마치게 되면 36개 초등학교 도서관에 총 18만1188달러를 전사자들의 이름으로 기부한 셈이 된다.   구씨 부부는 지난 2019년에 6.25 재단(625foundation.org)을 설립했다. 구씨는 “예전에 네팔 여행을 갔다가 우연히 한인 2세 학생들을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한국전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어 그때부터 교육 목적으로 재단을 설립했다”며 “한국전은 ‘잊힌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리지 않나. 6·25 때 미국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누리는 이 자유는 아마 없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구씨 내외는 재단 설립 후 전사자 고향 방문 프로젝트를 위해 ‘리버티 워크(Liberty Walk·자유의 걸음)’ 행사를 매년 6월25일 마다 개최했다. 1마일을 걸을 때마다 일정액을 기부하는 행사다.    가족을 비롯한 이웃, 친지, 동창 등 모두가 후원자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한국에서도 행사가 진행됐다. 후원자들과 주한 미군이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미8군 기지를 거쳐 국립중앙박물관까지 함께 걸었다.   구씨는 “첫 리버티 워크 행사 때가 한국전 70주년이었는데 그때 걷힌 모금액이 5033달러였다”며 “그때부터 5033달러를 기부 금액으로 정했고 여러 후원자의 기금과 사비 등을 털어 재단을 운영 중”이라고 말했다.   구씨 내외는 직접 운전을 하고 기부할 학교에 방문한다. 대부분 시골 지역 학교라서 구석구석 다니려면 비행기보다 자동차가 낫다는 판단에서다. 이 때문에 동부에 살면서 캘리포니아 등 서부 지역까지 운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기부를 위한 운행 거리만 무려 4만 마일이 넘는다.   구씨는 경기고등학교(57회),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1965년)했다. 이후 1967년에 미국에 온 구씨는 뉴욕에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체를 운영했다.   구씨 부부에게는 또 하나의 숙제가 있다. 차세대가 리버티 워크 행사를 이어받길 바라고 있다.    구씨는 “학교를 한 군데 정해서 교육구와 협의하고 결정이 되기까지 약 1년 정도의 준비 시간이 필요한데 젊은 친구들이 함께한다면 의미가 배가 될 것”이라며 “50개 주 방문 프로젝트가 끝나도 계속 리버티 워크 행사를 이어갈 수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은 3만7000여명이다. 7000여명은 여전히 실종(Missing in Action) 상태다.     자유의 걸음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한국전 전사자 전사자 고향 한국전 참전 초등학교 방문

2023-09-21

정전 70주년 기념식 개최…27일 미 40사단 사령부에서

한국전쟁 정전 70주년 기념식이 오는 27일(목) 오전 10시 로스알라미토스에 있는 미 40사단 사령부 연병장(11206 Lexington Dr. Los Alamitos)에서 열린다.   40사단은 캘리포니아 주 방위군 소속으로, 6.25에 참전한 유일한 보병사단으로 남아 있다. 이번 행사는 대한민국 육군협회 미서부지회(지부장 최만규)를 중심으로 미국 육군협회와 6.25 참전 유공자회가 공동 주최한다.   한국전 참전 유공자들과 재향군인, 40사단 현역군인들, 청소년 단체 등에서 약 120명이 행사에 참석할 것으로 전해졌다. 한인 단체나 일반인들도 참석을 원할 경우 사전에 전화(310-938-8785ㆍ최만규 지부장)로 연락해 참석 의사를 알리면 된다.   최만규 지부장은 "한국과 미국 6.25 참전 유공자에 대한 예우 및 감사를 전하고, 한국전으로 850여명의 희생자를 낸 40사단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자리"라며 "이번 행사를 통해 한미동맹이 더욱 굳건하게 유지되며 어린 학생들에게는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한미간의 미래 역사를 설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행사 취지를 설명했다.   이날 육군협회에서는 박민식 한국 보훈부 장관이 보내온 감사 메시지와 안병석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이 보내온 감사패 및 기념 메달을 40사단 관계자에게 전달할 예정이다.   또 보이스카웃 소속 청소년들이 참전 유공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할 예정이며 어바인 한인 학생회에서는 고마움의 의미로 준비한 복주머니를 전달할 계획이다.   특별히 행사에서는 한국전쟁 사진 전시회도 개최한다. 전시될 사진들은 6.25 당시 미 육군 보병 40사단 통신병으로 참전한 도미니크 스피나 병장이 촬영한 것들이다. 스피나 병장의 손녀가 한국 정부에 기증한 사진들은 LA 총영사관을 통해 주최 측에 전달됐다.   6.25 참전유공자회 미서부지회 이재학 회장은 "목숨 바쳐 젊은 시절 싸운 참전 용사들에 대한 미진한 인식과 대우에 대해 실망감이 크다"며 "한국은 지금 휴전 상황일 뿐 종전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며, 우리의 미래가 어리석은 위정자의 손에 놀아나지 않도록 올바른 역사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장수아 jang.suah@koreadaily.com로스알라미토 한국전 한국전쟁 정전 한국전 참전 한국전쟁 사진

2023-07-24

25일은 한인사회 '이벤트 수퍼 데이'

오는 25일(일)은 오렌지카운티 한인사회의 ‘이벤트 수퍼 데이’다. 이날 오전부터 오후까지 카운티 곳곳에선 굵직한 행사가 종일 이어진다.   수퍼 데이의 첫 테이프는 LA총영사관(총영사 김영완)이 끊는다. 총영사관은 이날 오전 10시 풀러턴의 힐크레스트 공원 내 OC 한국전 참전 미군용사 기념비(이하 참전비) 앞에서 제73주년 6·25 기념식을 진행한다.   총영사관 측은 지난해까지 LA의 총영사 관저에서 6·25 기념식을 개최했다. 올해 기념식엔 OC한인회(회장 조봉남)를 비롯한 다수의 한인단체 관계자, 한인 정치인 등이 참석한다.   오후 1시부터는 같은 장소에서 민주평통 오렌지샌디에이고협의회(이하 평통, 회장 김동수), OC해병대전우회(회장 정재동)가 마련하는 6·25 관련 문화 행사가 이어진다. 노상일 OC한인상공회의소 회장이 대회장을 맡은 이 행사의 주제는 ‘한국전에서 OC세계한상대회로’이다.   평통 측은 정오부터 케이터링으로 오찬을 제공하고 오후 1시부터 한미동맹 70주년과 미주 한인이민 120주년 등을 주제로 개최한 글짓기와 디카시, 그림 대회 시상식을 연다. 이후 샬롬합창단, 아리랑합창단, 경희코랄, 한인 성악가들의 축하 공연이 이어진다.   OC해병대전우회는 이날 주차 안내 봉사도 맡는다.   평통 측은 행사 하루 전인 24일 오후 4시 부에나파크의 로스코요테스 컨트리 클럽에서 영 김 연방하원의원 초청 ‘70주년을 맞는 한미 동맹의 미래’ 강연회도 열기로 했다.   참전비 앞에서 열릴 두 행사에 참석한 한인단체장들은 또 다른 이벤트 참가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일 전망이다.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미 남서부지회(회장 박굉정)와 실비치 분회(회장 이병문)는 오후 5시부터 실비치 레저월드 내 4번 클럽하우스에서 ‘참전용사 위로의 날’ 행사를 개최한다.   주최 측은 한국전과 베트남전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 참전용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마련한 이 행사에 한국전 참전 한인과 타인종 35명, 한인 베트남전 참전용사 44명을 초청했다.   같은 시간, 풀러턴의 은혜한인교회에선 ‘풀러턴·성남 친선 문화의 밤’ 콘서트가 열린다.   이 행사는 올해 자매도시 결연을 맺은 풀러턴과 성남 시가 함께 개최한다.   금난새 지휘자가 예술 총감독을 맡고 있는 성남시립교향악단과 메조소프라노 백재은씨, 테너 허영훈씨, 피아니스트 찰리 올브라이트 등이 출연,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의 하이라이트, 조지 거쉰의 ‘랩소디인 블루’, 제임스 무디의 ‘톨레도 스페인 환상곡’ 등을 선보인다.   두 도시 사이 다양한 교류 행사의 일환으로 마련된 이 공연은 누구나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임상환 기자한인사회 이벤트 이벤트 수퍼 오렌지카운티 한인사회 한국전 참전

2023-06-20

내일(28일) 참전 전몰용사 추념행사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샌디에이고 발보아 파크에 소재한  '미국의 집'(House of USA.회장 인기 김 웰치)이 28일(일) 오후 2시부터 이 공원 내 인터네셔널 코티지 잔디광장에서 참전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기념 행사를 갖는다.   마크 토이 예비역 소장을 비롯한 퇴역 장교들이 대거 참여하는 이날 행사에서는 미국의 집을 대표하는 청소년들이 참전 용사에 대한 헌사를 전하고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여러 전쟁터에서 숨진 전사장병을 기리는 각종 공연을 펼친다. 특히 한국전에 참전한  전몰용사를 추모하는 차원에서 샌디에이고 한인 커뮤니티에서도 주요 순서들을 맡았는데 소프라노 헬렌 오씨가 미국 국가를 부르고 지아나 최양이 헌사를 전하게 된다.     또 한국무용협회의 캐롤 정 강사는 살풀이 춤을 통해 한국전 참전 전사자들을 추모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서는 '아시안.태평양계 문화유산의 달'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하와이언 무스비와 그릴드 파인애플, 포춘 쿠키 등이 무료로 제공된다.   ▶일시:5월28일(일), 오후 2시~오후 4시   ▶장소:발보아 파크 내 인터네셔널 코티지 잔디 광장   ▶문의:(760)505-5828 (인기 김 웰치 회장)미국 전몰용사 참전 전몰용사 한국전 참전 참전 전사자들

2023-05-26

한국전 참전 용사 18명에게 평화의 사도 메달 수여

 주 샌프란시스코 영사관이 주관한 평화의 사도 메달(Ambassador for Peace Medal) 수여식이 지난 24일 오전 10시 오로라 시청에서 거행되었다. 이번 행사에서는 18명의 한국전 참전 용사 및 유가족에게 메달을 전달했다. 이날 행사는 짐 맥기브니 전 대한민국 콜로라도 명예영사의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윤상수 샌프란시스코 총영사를 비롯해 제이슨 크로우 연방하원의원, 마이크 코프만 오로라 시장,  밥 르게르 전 오로라 시장, 아트 아세베도 오로라 경찰서장, 정기수 한인회장, 국승구 민주평통덴버협의회장, 조석산 전 한인회장, 윤우식 덴버교역자회장, 유미순 재미콜로라도 콜로라도지역 한국학교 협의회장, 이승우 오로라자매도시 위원, 콜로라도 한인합창단원  등 1백여명이 넘는 지역 인사들이 참석해 수여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뜻을 전했다. 마이크 코프만 오로라 시장은 환영사를 통해 “오늘 이 자리는 한국전쟁에 참여해 한국의 평화와 발전에 기여한 18명의 위대한 군인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다. 개인적으로 나의 아버지도 한국전에 참여하셨다. 그래서 한국과 한국전 참전 용사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오늘 이 자리를 빌어 그들의 희생에 더욱 감사를 드리고 싶다”고 밝혔다. 제이슨 크로우 연방하원의원은 축사를 통해 “한국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 중의 하나이다. 한국전쟁을 통해 우리의 관계는 돈독해 졌으며, 오늘 이자리에 참석하신 용감한 용사들이 있었기에 우리의 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이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앞으로도 한미간의 우정은 지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윤상수 총영사는 “오늘 참석한 분들이 계셨기에 한국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여러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한국이 존재할 수 있었음은 절대 부인할 수 없다.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한국정부는 여러분들의 희생과 용기 그리고 헌신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며, 항상 기억할 것이다”라며 진심으로 머리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메달 수여는 윤상수 총영사가 마이크 코프만과 제이슨 크로우 연방하원의원과 함께 서서 직접 상패를 전달하고 메달을 목에 걸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이날 참석한 정기수 한인회장 은 “진심으로 가슴뭉클한 행사였다. 이 분들의 희생과 헌신에 고개숙여 감사드리며,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또, 윤우식 덴버교역자회장은 “참전용사들이 경례를 한 상태에서 한인합창단이 부르는 양국의 애국가를 함께 부르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날 정도로 가슴이 벅찼고, 감동적이었다”면서 행사에 대한 감회를 들려주었다. 한편, 본행사 후 참석자들은 시청 2층 카페테리아에 마련된 한식 중심의 점심식사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었다.    김경진 기자한국전 참전 한국전 참전 사도 메달 메달 수여

2023-02-28

한국전 참전 미군 후손에 장학금 준다

참전용사기념비위원회(이하 위원회, 회장 노명수)가 내년부터 한국전 참전 미군 후손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   위원회는 지난해 풀러턴 힐크레스트 공원에 OC한국전참전용사기념비를 건립하고 남은 약 40만 달러를 활용, 장학 사업을 펴기로 결정했다고 8일 밝혔다.   위원회는 내년부터 매년 미군 용사 후손 10명을 선정해 각 2000달러를 지급할 계획이다. 장학생은 미 재향군인 관련 기관, 단체의 추천을 통해 선발하고, 장학금 전달식은 6월 25일 또는 베테런스 데이(11월 11일)에 개최할 예정이다.   노명수 회장은 “위원들과 함께 남은 기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한 끝에 한국전 참전 미군 후손에게 장학금으로 보은하는 것이 기부자들의 뜻에 가장 맞는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밝혔다.   노 회장은 “기념비 주위에 맥아더, 백선엽 장군의 동상을 세우자는 의견, 충혼탑을 건립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장학금 지급이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의 공로를 지속적으로 일깨우는 방법이란 결론을 내렸다”고 설명했다.   위원회는 지난달 22일 부에나파크의 경복궁 식당에서 회의를 갖고 장학재단을 따로 설립하지 않는 대신 박윤숙 위원을 장학사업 디렉터로 선임했다.   위원회는 은행 이자 수입 외에 골프 대회 개최와 기부금 유치 등 장학 기금 추가 조성 방안도 검토 중이다.   노 회장은 “앞으로 위원회는 기념비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것, 참배와 헌화를 원하는 방문객을 돕는 것, 장학 사업에 전념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원회는 현재 기념비 건립 취지 등에 관한 설명이 담긴 안내판 설치 작업을 진행 중이다.   위원회는 장학 사업 외 업무 분담도 마쳤다. 안영대 위원은 재정, 토니 박 위원은 국기 및 게양대 관리, 박윤숙, 박동우 위원은 기념비 청소 및 관리, 행사를 각각 맡았다. 청소는 OC해병대전우회, 화랑청소년재단, 청소년 봉사단체인 라이프 리셋 등이 맡는다. 그 외 분야 업무는 강석희, 배기호 위원이 담당한다.   기념비 및 장학금 관련 문의는 노 회장(714-514-6363) 또는 박 디렉터(213-820-2929)에게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한국전 장학금 한국전 참전 장학금 지급 장학금 전달식

2022-11-08

한국전 참전 선친 기리려 기념비에 벤치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의 유족이 5000달러를 기부, 풀러턴 힐크레스트 공원의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 기념비(이하 기념비) 주위에 벤치 3개를 마련했다.   기부를 주도한 이는 토니 아눈시아토(풀러턴)다. 토니의 선친 프랭크 아눈시아토(1929. 6. 27~2015. 1. 19)는 6·25 당시 미 육군 소속으로 한국을 위해 싸웠다. 그는 귀국 후 아내 길다와 뉴욕에서 지내다 1998년 여섯 자녀가 사는 랜초쿠카몽가로 이사를 왔고 2015년 세상을 떠났다.   한인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LA총영사관은 지난 2020년 해병대전우회 미 서부연합회 주관으로 부에나파크의 더 소스 몰에서 열린 9·28 서울 수복 70주년 기념 행사에서 프랭크를 위한 평화의 사도 메달을 길다에게 수여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토니는 기념비 건립위원회(이하 건립위, 회장 노명수)에 가족이 모은 5000달러를 기부하며 특별한 부탁을 했다. 기념비 주위에 벤치를 만들고 그 벤치에 아버지의 이름을 넣어 달라는 것이었다.   건립위 측은 지난해 11월 11일 프랭크를 포함, 6·25 전쟁에서 희생한 미군 전사자 3만6591명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이후 토니가 부탁한 벤치 제작을 시작했고, 지난 21일 모든 작업을 끝냈다.   노명수 건립위 회장은 “기념비 근처 오리 연못 주위에 시 당국이 설치한 벤치와 같은 재질, 디자인으로 3개의 벤치를 만들어 콘크리트 바닥에 볼트로 고정했다”고 설명했다. 건립위는 기념비에 가장 가까운 벤치에 프랭크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도 부착했다.   박동우 사무총장은 이날 타주 출장으로 공원에 나와보지 못한 토니에게 “드디어 벤치가 완성됐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토니는 답신에서 “어머니, 가족과 함께 건립위와 LA총영사관에 감사드린다. 기념비 부지 공사 현장을 봤을 때부터 아버지가 기념비를 보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생각했다. 벤치를 통해 아버지를 오래도록 기릴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또 “아버지께서 생전에 새를 좋아했는데 벤치가 오리 연못을 향하고 있어 완벽하다. 주말마다 산책하며 이 벤치에 앉아 아버지를 기억할 것이다. 아직 벤치를 못 본 어머니를 모시고 가 놀라게 해드릴 것”이라며 기쁨을 드러냈다. 글·사진=임상환 기자한국전 기념비 기념비 건립위원회 기념비 주위 한국전 참전

2022-04-26

한국전 참전 미군 '기념비 청소' 화랑이 맡는다

 화랑청소년재단(이하 재단, 총재 박윤숙)이 풀러턴 힐크레스트 공원에 설치된 한국전 참전 미군 용사 기념비(이하 기념비) 청소, 주변 정리 봉사를 맡는다.   박윤숙 재단 총재는 최근 기념비 건립위원회(이하 건립위) 노명수 회장에게 기념비 청소 봉사를 약속했다. 이에 따라 재단의 청소년 자원봉사자 30여 명은 지난 17일 첫 봉사에 나섰다.   학생들은 한국전에서 희생된 미군 용사 3만6591명 전원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를 깨끗이 닦고 주위의 낙엽, 쓰레기를 정리했다.   재단 측은 “기념비 청소는 2세들이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를 하며 정체성을 깨닫도록 돕게 될 것”이라며 앞으로도 매 2주마다 청소 봉사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봉사는 매달 두 번째 주 토요일, 네 번째 주 일요일 오전 7시에 시작된다.     재단 청소년들은 지난달 11일 열린 기념비 제막식 진행, 건립위 웹사이트(www.ockoreanwar.com)와 한국전 참전 용사 명단 정리 자원봉사를 통해 기념비 완성에 도움을 제공한 바 있다.   재단은 수년 동안 월 1회, 글렌데일에 설치된 소녀상 주변 정리와 청소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노명수 건립위 회장은 “한인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2세들이 한인으로서의 긍지와 책임을 갖고 기념비 보존에 적극적으로 봉사하기로 한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기념비가 굳건한 한·미 동맹의 틀을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가도록 하는 상징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봉사 문의는 재단 대니얼 민 OC지회장(562-475-6068)에게 하면 된다. 임상환 기자한국전 기념비 기념비 청소 청소년 자원봉사자 한국전 참전

2021-12-26

[기고] 참전비 준공식과 노병의 눈물

 ‘재향군인의 날(Veterance Day)’과 6·25 유엔참전용사 추모일’이었던 11일 풀러턴의 힐크레스트 공원에서 ‘한국전 미군 참전용사비’ 준공식이 뜻깊게 거행됐다.     이번 기념비 건립의 의미는 크다. 첫째 의미는 미국 내에서 관이나 또는 군 관계 조직의 주도가 아니라 순수 민간인, 일반 시민, 특히 한인들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기념비라는 점이다.     두번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전사자 전원, 3만6591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라는 점이다.     세번째는 한국전 참전 기념비가 없었던 남가주 지역에 한인들에 의해 처음으로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이다.   그날 준공식에 예비역 해병으로 나도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한국 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를 치렀던 미해병 참전용사 한 분을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기회를 가졌다. 브라운이라는 올해 90세의 노 해병은 네바다주에서 왔다고 한다.     그는 1950년 샌디에이고의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해병대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6월 25일 한국전이 터지자, 급히 편성된 ‘해병 제1임시여단'에 소속돼 한국전에 파병됐다. 그의 나이 그때 18세였다. 낙동강 교두보 방어작전에서 싸우다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로 제1해병사단이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자 모(母) 부대인 제1해병사단에 복귀해 상륙작전에 참가했다. 제1착으로 월미도 탈환작전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 후 인천탈환 전투, 서울 수복작전을 마치고 다시 함정을 타고 원산상륙작전에 참가했다. 그리고 한국전에서 미군이 가장 고전하고, 또 10배의 적에게 포위 당해 전멸 위험에 처했던 장진호 전투에 참가했다. 이 전투는 세계 전사에 가장 유명한 '승리의 후퇴 작전'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도쿄의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은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과소평가하며, 계속 북진을 독촉했다. 하지만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 계곡에 들어섰을 때, 그곳에는 이미 미 해병사단보다 10배가 넘는 중공군이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꽹과리와 피리를 불며 야간에만 공격해 오는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해병들은 막대한 피해를 당했다.   더욱이 영하 30-40도의 추위가 더 문제였다. 계속 동사자가 나오고, 화기 및 각종 장비들이 얼어붙어 작동이 잘 안 됐다.     그러나 뛰어난 리더십의 올리버 스미스 사단장의 지휘로 해병제1사단은 중공군 7개 사단을 궤멸시키고, 중공군 제9병단에게 3개월간 전선에 나올 수 없도록, 큰 타격을 주면서 무사히 흥남으로의 철수작전을 마쳤다. 그렇게 해서 수많은 북한 자유민을 남으로 탈출시킬 수 있게 했다.     이때 스미스 사단장이 기자에게 한 명언이 남아있다.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방향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브라운 해병은 장신호 전투에서 동상에 걸리기도 하고, 거의 죽을 뻔한 부상도 당했지만 용케도 살아남아 이날 풀러턴의 기념비 제막식에 참석했다. 그는 치열했던 전투에서 전사한 전우들의 명단을 5개의 별모양 비석에서 찾아보면서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참전비 건립은, 그날 브루스 휘태커 풀러턴 시장이 말한 것처럼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 아니라, '항상 기억하는 전쟁'이 되게 할 것이다. 또한 한국인들이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민족임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와 함께 한미동맹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도 일조할 것이다. 앞으로 미국 각 지역에 한인들의 주도로  참전용사 기념비가 계속 세워지기를 기대한다.  김택규 / 국제타임스 편집위원기고 참전비 준공식 미해병 참전용사 한국전 미군 한국전 참전

2021-11-15

[기고] 한국전 참전비 건립 '12년'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 직속 장애정책위원(차관보 급)으로 임명돼 워싱턴DC를 처음 방문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     6.25 전쟁 중에 태어났기에 한국전 참전 희생 미군 용사들에게 감사드리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링컨 메모리얼파크의 한국전 기념비를 찾아 갔다. 워싱턴DC 회의 때면 백악관 옆 윌러드 워싱턴 인터콘티넨털 호텔에 숙박하는데 호텔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한국전 기념비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한국전 기념비에 참전 희생 미군 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2009년 처음 방문에서 나는 한국전 참전 희생 미군 3만6593명의 이름을 모두 새겨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12년 전 이렇게 시작된 기념비 건립 결심이 다음 주 풀러턴에서 준공식을 올리게 됐다.     초대 김진오 회장, 오구 공동회장을 설득해 기념비 건립을 위해 브루스 휘태커 풀러턴 당시 시장과 제니퍼 피츠제럴드 부시장을 만났다. 2014년에는 더그 체이피 시장과 풀러턴에 기념비 건립 상호양해 각서도 체결했다. 이 모든 일의 뒤에는 2013년부터 내가 보좌관으로 근무하는 섀런 쿼크-실바 주 하원의원의 도움이 컸다.   2016년 김진오 회장이 운명하고 오구 공동 회장도 세상을 떠나면서 당시 노명수 추진위원장이 회장으로 바통을 이어 받았다. 나는 다른 위원들과 함께 무보수 자원봉사 사무총장으로 기념비 건립에 참여해 왔다.   토니 박 서기가 생각해 낸 오각형 별 모양의 기념비 디자인은 풀러턴시에서 건립 장소를 허락 받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 이 디자인이 실바 하원의원의 남편인 헤수스 실바 시장에게 전달돼  시의회 만장일치로 2019년 11월 5일 통과됐다. 이날 의회에서 통과된 기념비 장소는 힐크레스트 공원 북쪽 덕 폰드 건너편이다.     당시 기념비 건립 소요 비용에 비해 기금 모금은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수준이었다. 천만다행으로 기념비 건립 장소가 풀러턴 시의회를 통해 확정되면서 한국 보훈처에서 해외 보훈 사업으로 인정해 23만7000달러를 지원했다. 김진오 초대 회장의 개인 사재 약 25만 달러와 보훈처 기금이 크나큰 종잣돈과 원동력이 됐다.     기금 모금에 참여해 1000달러 이상 후원하는 한인에게는 박경재 LA총영사와 노명수 회장 명의의 감사패도 증정했다.     이후 기금 모금이 활성화되면서 기념비 건립 착공에 청신호가 켜졌다. 기념비 건립위원회에 새로 역량 있는 위원들도 많이 동참했고 한국 측 위원회에서도 힘을 보태주었다. 또한 한인언론들도 기념비 기금 전달 홍보 기사로 협조했다.     특히 동포사회의 십시일반 기금 모금은 큰 힘이 됐다. 수많은 한인들의 적극적이고 희생적인 협조와 동참에 기념비 건립위원들은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한국전 참전 희생 미군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11일 준공식을 갖게 된다. 이 날은 미국 ‘베테런스데이'이기도 하다.     올해 11월 11일은 미국 내 최초로 한국전 참전 희생 미군 용사 3만6593명의 이름이 모두 새겨진 한국전 기념비가 건립되는 역사적인 날이다. 한국 전쟁 71년, 휴전협정 68년 만에 보훈의 기념비를 성공리에 준공함으로써 참전 용사들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됐다. 박동우 / OC한국전 참전비 건립위원회 사무총장기고 한국전 참전비 한국전 기념비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

2021-11-02

한국전쟁 60주년 그후 <3>…전쟁 고아들 입양돼 미국으로

예수사랑나눔선교회의 이영배 선교사 부부는 매주 일요일 애틀랜타 다운타운 홈리스 쉘터에서 무료 급식 봉사를 한다. 주중에는 식당을 하고 주말에는 70~100인분의 음식을 만들어 노숙자들에게 대접한다. 1954년생인 이 선교사는 전쟁고아다. 그는 참전용사인 아버지가 전투중 부상으로 사망한 뒤 5남매의 손을 잡고 월미도 영종보육원을 찾아갔다. 이 선교사는 “고아로 자라 배고픔이 어떤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며 “월미도 주둔 미군 해병대 아저씨들이 준 옥수수와 우유를 먹고 자랐고, 명절 때마다 준 초콜릿과 막대사탕을 준 아껴먹었던 기억이 선하다”고 회고한다. 이 선교사는 “노숙자 중에는 주한미군 출신도 많다”며 “미군 원조를 먹던 고아가 커서 미국 노숙자에게 한국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마치 운명같다”고 말했다. ▷숨겨진 상처 ‘전쟁고아’= 한국전쟁은 전사자와 부상자 뿐만 아니라 고아들을 양산했다. 이들중 상당수는 미국에 입양됐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미국에 입양된 전쟁고아는 5348명에 달한다. ‘애틀랜타 한인이민사’는 한국전쟁중 부모가 사망하거나 가족을 잃어버린 아이들이 애틀랜타에 입양되기 시작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1950년대 후반 주한미군으로 복무한 스탠 피셔(71) 씨는 남녀 고아 2명을 입양했다. 피셔 씨는 “한국 주둔 당시 부대 차원에서 위문간 고아들을 잊지 못했다”며 “미국에 돌아오고 나서 그들이 다시 생각 나 한국 고아를 입양했다”고 밝혔다. 피셔 씨의 두 자녀 역시 변호사와 비즈니스맨으로 성장했지만 한인사회와 교류는 적다. 한인들을 위한 시민권강사로 활약하는 피셔 씨는 “자녀들이 아쉽지만 한국에 대한 관심은 없다”며 “자녀들의 판단을 존중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전쟁고아와 입양아들은 한국인의 핏줄임에도 불구하고 미주 한인사회와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못한다. 한인사회의 보수성과 순혈주의, 입양아라는 출신 때문에 성장해도 한인사회를 멀리하고 있다. 입양아 출신 작가 제인 정 트렌카 씨는 “미국내 한국출신 고아들의 숫자가 적지 않지만, 입양인들은 여전히 한인과 접촉하고 한인사회에 진출하길 꺼려한다“입양인들은 한인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도록 요구받곤 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잊혀진 이름 ‘전쟁 신부’= 전쟁 신부(war bride)들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소외된 또다른 그룹이다. ‘애틀랜타 한인 이민사’에 따르면 한국에 주둔한 20대 미군 청년들이 한국여성들과 교제하면서 결혼해 미국으로 이민온 여성들의 숫자가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여명으로 추산된다. 남동부에 산재한 미군기지 주변에는 아직도 전쟁신부들을 흔히 볼수 있다. 조지아주의 경우 포트베닝 육군기지가 위치한 콜럼버스, 도빈스 공군기지가 위치한 마리에타에서 전쟁신부들이 머물렀다. 콜럼버스 반석장로교회 박성만 목사는 “미군과 결혼한 전쟁신부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을 잊지 않고 남편과 함께 한국교회를 찾으며 한미관계를 잇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일부 전쟁신부들은 이른바 ‘양공주’라는 편견을 피해 한인사회와의 접촉을 피하기도 한다. 40년전 미군과 결혼한 김 모 씨는 “‘양공주’라는 말이 듣기 싫어 한국사람이 없는 곳으로 피해가서 살기도 했다”며 “한인들이 드문 노스캐롤라이나, 테네시주에는 미군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후 고독한 노후를 보내는 전쟁신부들의 사연도 드물지 않게 들려온다”고 밝혔다. 이종원 기자

2010-06-24

한국전쟁 60주년 그후<2>… 전쟁 후 미국 이주 러시

김광현 전 애틀랜타 한인회장(88)은 60년 전을 잊을수 없다. 6.25 발발 당시 수도경비사령부 당직 장교였던 그는 이날 새벽 북한의 남침 소식을 듣고 “같은 동족을 이렇게 침략할수 있는가”라고 한탄했다. 40여년 후 미국에 정착하고 북한관광을 간 그는 관광안내원이 “북침설”을 주장하는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날 그때를 겪은 사람이 엄연히 여기 살아있는데, 미국에 있어도 북한에 있어도 그때 일은 영원히 잊을수 없다”고 회상했다. △이민사회 주축된 참전용사=한국 전쟁 이후 한인들의 미국 이주가 러시를 이뤘다. 이주자중에는 한국전 참전자들도 적지 않았다. 재향군인회 미남부지회에 따르면 남동부 6개주에 거주하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는 70여명이다. 이들은 미국 이민 후에도 군 경력을 살려 이후 남동부 이민사회 주축으로 활약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중위였던 김광현 씨는 대령으로 제대한 후 83년 미국으로 이민온 후 19대 애틀랜타 한인회장, 초대 재향군인회 미남부지회장 등을 역임했다. 도라빌에 거주하는 김종구(82) 씨는 한국전 참전 후 대위로 제대한데 이어, 페이엣빌 한인회장, 동남부연합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김 씨는 “군 출신들은 결속력이 좋고 집단 운영에 능하며 반공정신이 투철했다”고 회상했다. △초기이민 기틀잡은 유학생=참전자 뿐만 아니라 전쟁 중 미군과 인연을 맺은 당시의 청소년들도 미국에 건너 왔다. 이들은 민족의 비극이 다시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향학열을 불태웠다. 이들 중 상당수가 애틀랜타에 정착해 한인사회가 기틀을 잡는데 일조했다. 테네시 주립대 김근하 명예교수는 “서울대 공대 입학 직후 한국전쟁이 터져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UN군 심리작전과에 취직해 영어번역 업무를 맡았다”며 “당시 같이 일했던 심리전 장교 셰퍼드 중위와 보증을 서 줘, 듀크 대학 입학에 성공할수 있었고 이후 남동부에 정착했다”고 회상했다. 스와니에 거주하는 한국국제교육원 이유상 대외협력 고문은 “한국전쟁 당시 중학생이었던 우리들은 부산 후퇴 후에도 천막학교에서 공부해야 했다”며 “가난한 와중에도 영어를 배우고 싶어 미 문화원에 부탁했고, 그 인연으로 유학에 성공할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들의 이민 생활은 쉽지 않았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이민온 1950~1970년대 애틀랜타 등 미국 남부 지역에는 흑백 인종차별이 엄존하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들은 인종차별을 극복하고 한인사회 터전을 일궈냈다. 전쟁을 겪으면서 다져진 굳센 의지가 힘이 됐던 것이다. 이종원 기자

2010-06-23

한국전쟁 60주년: 한국전과 미국 그리고 조지아(1)…“긴 시간 지났어도 한국 못잊어”

오는 25일은 한국전쟁 60주년을 맞는 날이다. 한국전쟁은 한국의 현대사는 물론, 미주한인 이민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전 60주년을 맞아 참전용사의 증언과 학계의 진단을 통해 한국전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한인사회의 새로운 좌표와 미래지향적인 한-미 관계 정립을 모색해본다. 알파레타 참전용사 기념공원에 가면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9피트 높이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그 바닥에는 한국전에서 전사한 조지아 출신 미군 740명의 명단이 새겨진 벽돌이 깔려 있다. ▷한국군 감투정신에 감명= 한국의 재향군인회 격인 아메리칸 리전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전쟁 3년간 연인원 180만명의 미군을 한국전쟁에 파병했다. 이 가운데 5만6246명이 전사했다. 전사자중에는 조지아주 출신도 740명이나 된다. 보수적 성향의 남부 출신 답게, 대부분의 조지아 참전용사들은 전쟁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군의 감투정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조지아텍 출신으로 참전해 휴전협상에 임했던 해롤드 A 다이 퇴역 준장은 “수송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릴 때까지 한국에 대한 지식은 전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며 “그러나 내가 만난 모든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와 싸운다는 감투정신에 불탔다”고 밝혔다. J.R. 웨이지즈 퇴역 준위는 “한국의 험한 산지와 논과 밭, 그리고 인분으로 만든 거름을 뿌리는 한국의 농지를 보고 처음엔 소스라치게 놀랐다”면서도 “미군은 물론 모든 한국군이 ‘낙동강에서 밀리면 바다에 빠져 죽는다’는 각오로 싸웠고, 나 역시 금강 전투에서 다리에 총을 맞고 2주간 후송됐다”고 회고했다. ▷지역사회 지원 활발= 조지아와 한국전과의 인연은 병사들만이 아니다. 전쟁으로 인한 고아와 부상자를 돕기 위해 애틀랜타를 비롯한 조지아주의 기부와 봉사도 활발했다. 스톤마운틴에 있는 하이랜드 교회의 1953~1954년 고아들의 성장에 필요한 단백질과 비타민 확보를 위해, 생선간유 모으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교회 측은 “오래전 일이라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한국 고아들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기쁜 일”이라고 밝혔다. 또 애틀랜타 라이온스 클럽, 조지아 남성 클럽 등에서도 한국전 고아 돕기 기부 캠페인을 벌인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애틀랜타 아그네스 스캇 칼리지 출신 유학생 필리 최 씨가 서울에 ‘성부 고아원’(Holy King Orphanage)을 설립하고, 애틀랜타 지역사회의 기부로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참전용사의 오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은 미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잠재적 친한파로서 남부 지역사회에 한국을 알렸다. 한국전쟁 직후 2사단에서 휴전선에 중사로 복무한 듀란트 시그넷 씨는 “의무군복무로 선택의 여지없이 간 한국이었지만, 젊은 시절 접한 새로운 세계는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들은 한국전 참전용사회를 결성하고 2개월마다 애틀랜타에서 모임을 갖고 있다. 참전용사회 회원인 해롤드 다이 씨는 “휴전협정을 맺을 때만 하더라도 이 상태가 60년이 갈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며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과 북한의 궁핍함을 볼 때마다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낀다”고 자랑스러워 했다. 공화당의 유력한 주지사 후보인 존 옥센다인 보험 커미셔너의 아버지 제임스 옥센다인 역시 한국전에서 부상당한 참전용사다. 옥센다인 후보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몸속에 박힌 중공군의 탄환을 가리키며, 한국전 참전을 언제나 자랑스러워하셨다”며 “이후 주정부 커미셔너로 근무하면서 한국을 방문하며 한국의 경제발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종원 기자

2010-06-22

[OC] [참전 용사에게 듣는다, 내가 겪은 한국전쟁] "겨울 티셔츠만 입고 떨던 전쟁고아 생생"

세리토스에 사는 동갑내기 루벤, 밴다이크는 한국 새에덴교회 초청으로 방한하는 41명의 참전군인, 가족 방문단에 속해 있다. 19세의 나이에 자유를 지키기 위해 미지의 나라와 인연을 맺었던 두 사람에게 60년 전 한국에서의 상황을 들어 봤다. 몬태나주 출신 해병 밴다이크는 한국행을 앞두고 일주일간 가주 북부 시에라 산맥 근처에서 추위 적응 훈련을 받았다. 그는 "출발을 앞두고 휴가를 받아 집에 갔는데 어머니가 슬픈 눈으로 배웅했던 기억이 난다"면서 "꼭 살아 돌아오겠다고 약속한 당시 상황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말했다. 루벤은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육군 의무병으로 중부전선에 배치됐다. 그는 생후 4일된 딸을 뒤로 하고 무거운 발길을 옮겨야 했다. "아내와 딸을 두고 떠나는 마음은 너무 아팠지만 전쟁으로 고통받는 한국을 돕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는 루벤은 한국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산과 들에서 왜 전쟁이 일어나야 했는지 참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 사이에 고지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 허다했고 꽃다운 젊은 청년들도 많이 죽었다"면서 "전쟁 고아들이 추운 겨울에 티셔츠 하나만 입고 떨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잠시 눈가를 훔쳤다. 밴다이크는 인천과 임진강을 오가며 전방에 물자를 수송했다. 그는 "어느 날 인천항에서 군수물자를 싣는데 어린아이들이 몰려와 먹을 것을 달라더라"며 "대신 물건을 주었는데 그 새 주머니가 털리는 봉변을 당했다"고 말했다. 밴다이크는 "화가 났지만 얼마나 생활이 어려웠으면 아이들이 저랬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한국 사람들과 좋은 기억도 함께 나눴다. 밴다이크는 "후방에서 잠시 틈이 나면 마을에서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기도 했다"면서 "산과 마을 지리에 익숙한 아이들과 함께 꿩을 잡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들은 잔뜩 설레는 한국 방문에서 가보고 싶은 곳도 많다. 루벤은 철원과 왕정 등 참전했던 곳을 돌아보고 싶다고 한다. 밴다이크는 당시 직접 찍은 서울역 사진을 보여주며 서울역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또 인천항 근처 논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루벤은 "당시 한국 돈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번에 가서 지금 돈으로 바꿀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는 "그동안 TV와 친구들의 소식을 통해 발전한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전쟁으로 자유를 찾은 한국의 모습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마음에 담고 싶다"고 소망을 전했다. 이들은 방한 기간 중 일주일 일정으로 판문점과 전쟁기념관 서울의 주요관광지를 둘러보며 변화된 한국의 모습을 살펴보게 된다. 또 한국전쟁 해외 참전용사 100여명과 한국인 참전용사 300여명 미8군 장병 및 가족들이 함께 참석하는 연합만찬 및 예배에도 참석할 예정이다. 백정환 기자

2010-06-15

[내가 겪은 6·25] 영어 칼럼니스트 조화유씨, 큰형은 국군…작은형은 인민군 '가족간 총부리'

조씨는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6.25의 실상을 일깨워주기 위한 목적으로 책을 내놓게 됐다”고 설명했다. 60대 후반의 조씨를 6.25 세대로 치부하기에는 다소 젊은 감이 있지만 그 역시 초등학교 2학년 시절 가족과 함께 전쟁의 참상을 몸소 체험했다. 이같은 경험은 이번 창작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공산당 폭정 몸서리 서울에서 살던 조씨는 8살이던 초등학교 2학년 6.25동란을 만났다. 통신수단이 발달되지 않던 시절 ‘전쟁이 터졌다’는 말이 소문으로 돌았다. 하지만 당장은 시큰둥했다. 일부 주민들은 짐을 꾸려 집을 떠나기도 했지만 조씨 가족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러다 서울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됐다. 어느새 다시 학교를 나오라는 통지문도 왔다. 어린 조씨는 학교에서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와 인민군 군가 등을 배워야했다. 또 작은 형은 인민군에, 누나는 여성동맹에 강제로 징집돼 부당한 군역과 노역을 감당해야 했다. ◇자유 찾아… 남으로, 남으로 배고픔은 더욱 참기 어려웠다. 동네 근처 남의 토마토 밭이나 참외 밭에 들어가 서리하기도 일쑤였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는 판단에 조씨 가족은 고향인 경남 거창으로 이주하기로 마음먹었다. 기차가 있기는 했지만 인민군이 군사용으로 사용하는 바람에 걸을 수밖에 없었다. 군대간 두 형과 난리통에 병사한 막내 동생을 제외한 남은 식구들이 모두 나섰다. 다행히 여름철이어서 노숙이 어렵지는 않았으나 역시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겨 쥐어야 했다. 급기야 피난 보따리에서 값나가는 물건을 식량과 바꿔 먹기도 했고 인심 좋은 농가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물론 중간중간 폭격의 위협도 만만치 않았다. 이렇게 한달이 꼬박 걸려 고향 마을에 도착했다. ◇가족간 총부리… 상잔의 아픔 큰형은 국군 공군조종사였다. 그런데 작은형이 인민군에 끌려가는 바람에 조씨 가족은 한지붕에서 남북이 갈려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처지가 됐다. 양 진영 군대로 간 형들의 소식을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큰형은 L19라는 경비행기를 타고 고향 상공을 통과하다가 집에 편지를 떨어뜨려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주곤 했다. 돌멩이가 든 편지는 멀리 떨어진 이웃집 장독대에 떨어지기도 했다. 이 ‘우표 없는 속달우편물 투하사건’은 한동안 동네에서 화제거리가 됐다. 이 에피소드는 이번 중편소설 ‘전쟁과 사랑’에도 등장한다. 다행히 인민군에 끌려갔던 작은형 역시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 및 국군의 대반격을 받고 후퇴할 때 부대를 이탈, 고향 마을을 찾아왔다. ◇전쟁의 참상 제대로 알려야 조씨는 이번 저서에 6.25 당시 시대 상황과 남북 분단의 긴장 관계, 한국의 좌우 이념 대립 등을 주제로 한 3편의 소설을 수록했다. 여기에 남녀간 사랑이야기를 가미시켜 재미를 더했다. 조씨는 “젊은 세대에게 한국과 남북의 대치상황, 6.25의 참상을 제대로 알려주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 ‘영한대역 6.25전쟁 이야기’도 저서에 포함시켰다. 영어공부를 미끼로 해서라도 제발 6.25 전쟁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한글로 작성되고 곧바로 영문으로 번역된 문장을 통해 전쟁 표현 등도 익힐 수 있다. 젊은 층의 관심을 끌고자 만화 삽화까지 곁들였다. 이밖에 창작집에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 종군 여기자 ‘마게리트 히긴스’의 6.25 관련 일화와 한국전 걸작 사진 10선 코너도 수록, 전쟁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천일교 기자

2010-06-10

[한국전쟁 60주년···내가 겪은 6·25] "죽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싸웠는데…한국 정부 관심 절실"

전쟁 그리고 죽음. 두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엔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전우의 죽음을 수없이 목격해야 했던 22살의 젊은이는 그렇게 이를 악물고 앞으로 달렸다. 60년이 지난 지금, 그 때의 젊은이는 어느덧 82세의 백발 노인이 됐다. 버지니아 애난데일의 한 노인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변희선씨. 이제는 지팡이에 의지해서 걸을 정도로 노쇄해졌지만 6.25 전쟁 당시엔 최전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던 ‘전장의 영웅’이었다. 그가 군에 입대한 것은 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8년. 고작 18살 때였다. 백골부대로 불리던 수도사단 3사단 18연대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진급을 거듭했고 22연대 소속 특별공격대 대장으로 진두지휘를 맡았다. “총 들고 수류탄 던지고…. 매번 ‘죽는다’는 각오로 전투에 나섰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총알이 나를 피해가더군요.” 전투는 참혹했다. 곳곳에서 수류탄이 터지고 총쏘는 소리, 비명 소리에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동료가 쓰러져나가고 피가 튀는 전쟁터는 그야말로 아수라장.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오로지 ‘싸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앞으로 나가고 또 나갔다. 변씨는 김일성 고지 전투 때 1개 분대를 이끌고 고지 탈환을 이끈 주역 중 한명이기도 하다. 빗발치듯 쏟아지는 총알 속을 뚫고 달려나갔다. “지휘관이 약하면 모두가 흐트러지기 때문에 마음을 굳게 먹었 수 밖에 없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전투에 전투를 거듭하면서도 부상을 입지 않는 기적은 계속됐다. 전쟁이 끝난 후 준위로 임관, 72년 제대할 때까지 춘천 3보충대 제2 공수단에서 젊음을 바쳤다. 제대 후엔 워싱턴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 뒤엔 자동차 정비사로 일하며 바쁜 이민 생활속에 빠져들었다. 아들 둘, 딸 둘을 다 키워놓고 나니 어느새 6.25 전쟁 60주년을 맞았다. 남다른 감회에 젖다가도 한국 정부를 떠올리면 아쉬운 점이 많다. “우리가 뭘 위해 싸웠습니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제 살아남은 사람도 얼마 안남았습니다. 해외에 있는 참전 유공자들이 조국에 대한 사랑을 더 느낄수 있도록 초청 사업 등을 더 확대해 줬으면 합니다.” 1928년생인 변희선씨는 워싱턴 지역 6.25 참전유공자회 회장을 지냈으며,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등을 수상했다. 유승림 기자 ysl1120@koreadaily.com

2010-06-07

[한국전쟁 60주년…내가 겪은 6·25] “내 이름 ‘링크’처럼 은인들의 인연에 감사”

링크 화이트씨는 ‘꼬마 서승원’ 때부터 비범한 아이였다. 배고픈 가족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해 무작정 평양 길에 오르는가 하면 9살 때는 미군 클럽의 바텐더로 명성을 날렸다. 미군 참전용사이자 부동산 비즈니스맨,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자신의 이름 ‘링크(Link)’처럼 은인과의 연결고리를 항상 기억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7살 꼬마, 주린 가족 위해 김일성 장군 찾아 홀로 평양행 그는 1942년 함북 나진에서 3남 1녀 막내로 태어났다. 2년 뒤 함흥으로 이주한 그의 가족은 아버지가 일제시대부터 나막신과 나무로 된 소총을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한 덕분에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그러나 독립 후 공산정권이 북한을 장악하고 모든 사유재산을 빼앗으면서 어려움은 시작됐다. 김일성 대학에만 가면 김일성 장군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평양행 기차에 올랐다. "기차를 잘못 탔는데 역무원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김일성 대학에 다니는 형을 만나러 가야 한다고요. 당시 그 대학의 특권과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역무원들이 평양까지 저를 데려다 줬지요.” '가짜’ 동생인 체하면서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던 그는 학교 담당자로부터 ‘그런 학생은 없다’며 쫓겨났다. 그리고 가출한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나이 7살이었다. ▷6·25전쟁, 총 알 한방이 아까워 곡괭이로 공개 처형한 북한군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났다. 어느 날 마을 하늘에 생전 처음 보는 전투기가 날라 들더니 함흥의 길목인 다리에 폭탄을 쏟아 부었다. 그 날부터 그와 온 동네 주민들은 미군이 퍼붓는 ‘포탄 세례’를 피하기 위해 매일 아침 점심을 싸 들고 동네 산에 숨어 있다가 저녁때가 되면 돌아왔다.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파편은 작은 조각이라도 맞으면 목숨을 잃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미군의 공세에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했다. "북한군은 떠나기 전 민주주의자로 몰려 감옥에 있던 사람들을 공개 처형을 했어요. 전시에 총알 한 방이 아깝다면서 사람들을 줄에 매달고 곡괭이로 찍어서 죽였어요. 정말 악질하고 잔인했어요.” ▷8살 꼬마, 백골부대 청소부로 취직하다 1950년 가을 미군 백골부대가 마을을 점령했다. 한 가정당 1명씩 일꾼을 지원하라는 미군의 요청에 그의 형이 미군 부대의 청소부로 취직했다. 8살 꼬마에게 “거인처럼 보인 미군들”이 일자리를 줄 리 없었다. "말없이 군인들이 버린 담배 꽁초나 커피 잔을 치우기 시작했어요. 빗자루가 제 키만 했었죠.” 그를 며칠 동안 지켜보던 스티븐스 상사는 그에게 정식 청소부 자리를 내줬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일본어를 배웠던 스티븐스 상사는 그에게 ‘치사이’란 이름을 붙여줬다. 일본말로 ‘꼬마’였다. 그 해 추수감사절에는 스티븐스 상사가 2달러, 또 다른 상사가 4000원을 그에 손에 쥐어줬다. 그 돈이면 당시 작은 집도 살 수 있는 아주 큰 돈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열흘 뒤에 꼭 돌아올게요" 그 해 12월 초 중공군이 밀물처럼 내려왔다. "미군이 급하게 철수하게 됐는데 스티븐스 상사는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저를 데리고 가고 싶어했어요. 그래서 부모님께 열흘 후에 꼭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드렸죠. 그 때가 부모님과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을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는 부대를 따라 부산을 거쳐 안동으로 이동했다. 온갖 잔심부름을 마다 않고 열심히 일했다. 군인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해 씨름을 의무적으로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1951년 어느 날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한국군 상사의 부탁으로 담배를 대신 사주다가 암시장 일원으로 오해를 받았다. "군에서 쫓겨나고 여기 저기 헤매다 육군 10군단 기지에 도착했어요. 하우스보이로 일하던 한 형을 붙들고 무조건 재워달라고 사정했지요. 알고 보니 이 형도 평양에서 출신이었어요.” 그는 조지 김이라 불리던 이 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조지 형은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 같은 사람이에요. 형의 보살핌으로 갈 곳 없던 제게 희망이 보였거든요. 지금 한국에 살아있다면 꼭 은혜를 갚고 싶어요.” ▷11살 소년, 양아버지를 만나다 1951년 7월 상사 전용 클럽에서 웨이터와 바텐더로 발탁됐다. "당시 미군을 위문하기 위해 할리우드 스타들의 공연이 많았어요. 그 때 만난 당대 최고 여배우인 테리 무어씨는 지금도 엄마 같은 친구로 막역하게 지내고 있어요.” 1953년 휴전 후 그가 있던 10연대를 6·25전쟁 영웅인 백선엽 장군이 맡게 된다. "백 장군을 그 때 처음 뵈었죠. 미국에 와서도 연락을 드렸고, 얼마 전에 워싱턴에 오셨을 때도 찾아 뵙고 인사도 드렸어요.” 1954년 4월. 그의 인생을 뒤바꾸게 된 그의 양아버지인 앨버트 트루먼 화이트 상사를 만났다. “클럽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술을 마시고 있던 한 군인이 저에 대한 질문을 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내 양아들이 되지 않겠냐’고 묻길래 농담인 줄 알고 ‘예스(yes)’했죠.” 40대 중반으로 아이가 없었던 화이트 상사는 다음날 그의 약속을 지켰다. 매일 밤 그에게 영어 쓰기와 읽기를 가르쳤다. 아시안에 대한 입양이 까다로웠던 탓에 미 대사관 직원과도 주먹 싸움을 불사했다. 이듬해인 1955년 7월 19일, 12세 소년 서승원, 아니 ‘체사이’는 링크 화이트로서 뉴저지 땅을 밟았다. "링크(Link)란 이름은 한 잡지를 보고 제가 지었어요. 저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인연으로 여기까지 왔잖아요. 연결을 의미하는 링크, 그 끈끈한 제 은인들과의 연을 제 이름으로 남기고 기억하고 싶었어요.” ▷베트남전 장교 되다 그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던 양아버지 화이트씨가 1964년 5월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듬해 군에 지원했다. "꼭 장교가 돼야겠다는 생각에 가장 터프 하다는 조지아주 장교후보생대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장교가 됐죠.” 한국, 독일, 일본 등에서 군생활을 했던 그는 베트남전에 출전하게 됐다. 어릴 적 한국에서 씨름을 하고 놀았던 미군 상사들과의 극적인 재회는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터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십 여 년 전 청소부 꼬마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보다 상사인 장교가 돼서 나타났으니 얼마나 놀랬겠어요. 손은 제게 경례를 하는데 입은 떡 벌어져 있더라고요.” 베트남전은 정말 지독했다. 그는 이때 적의 공격으로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대신 미군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에게 주는 훈장인 퍼플 하트 훈장과 용감한 군인에게 수여하는 동성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화이트씨는 베트남전 이후 군생활을 접었다. "전쟁이라면 진저리가 났어요. 공무원 생활을 거쳐 1988년부터 상업용 부동산 에이전트로 비즈니스를 하기 시작했죠.” 또 군 재직 시절 군 신문사에서 기자로도 활동했던 그는 작가로서의 길도 걷게 된다. 1995년 그는 “자신의 은인들에게 바치는” 자서전 ‘치사이의 이야기(Chesi’s Story)‘를 출판했다. 현재 북버지니아서 부인 제니씨와 살고 있는 그는 첫 번째 부인 사이에서 아들 1명을 두고 있다. "지금 제 아내는 북한의 제 어머니를 많이 닮았어요. 생김새도 성품도요. 사실 어머니는 양어머니였어요. 단 한번도 그 사실을 제게 알린 적이 없었고요. 한 순간도 어머니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없어요.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시겠지만요.” 현재 그는 베트남전의 실화를 토대로 소설을 집필 중이다. 고향에 대한 향수는 항상 있다. 그러나 그는 강조했다. "평화 통일이 된다면 고향에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공산주의가 남아있는 한 북한에 발을 들여 놓고 싶지는 않아요.” 이성은 기자 graceful@koreadaily.com

2010-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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